여인은 오늘도 쇼핑을 하고 있다. 아이가 찾는 장난감을 찾기 위해 온 동네의 장난감 가게며, 쇼핑몰이며 돌아다니고 있다. 장난감 하나를 사는 게 이리도 힘들 줄은 몰랐다. 유치원 친구들은 다 가지고 있다며, 조르지는 않아도 눈물 글썽이는 모습에 소매를 걷어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인기가 있을 일인가 싶기도 하다. 티브이에서 나오는 그럴듯해 보이는 상술에 등골이 빠지는 것은 부모다. 이런 마케팅은 배워 써먹어야겠다 다짐했다. 내년에는 그녀의 회사가 좀 더 잘 되기를 스스로 바라본다. 다음 주에는 마케팅 팀에게 이것과 관련해 프로젝트를 하나 던져줘야겠다. 역시 우리나라는 아이에 관련된 것이라면 장사가 된다. 미디어란 참 대단하다. 드라마에 잠깐 PPL처럼 나온 스노우 볼이 이제는 구하려야 구할 수 없는 인기 상품이란다. 마케팅도 대단하지만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냄비 근성도 볼만하다.
어제는 홈플러스를, 오늘은 이마트를, 여기도 없으면 좀 비싸더라도 백화점까지 갈 계획이다. 많이 걸어야 할 것을 대비해 운동화도 신고 나왔으니 문제없다. 올해는 그럴싸하게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난다. 한동안 거리에서 캐럴 들을 일이 없었는데 반갑다. 캐럴에, 트리며, 조명이며 괜히 사람기분을 들뜨게 한다. 나온 김에 미리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갈까도 싶다.
헤아려 보니 직접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나온 것도 오래되었다. 그간 사업이 바빠 시즌이 되면 인터넷으로 주문하거나 온라인이 품절일 때는 직원을 시켜 매장을 돌게 부탁하기도 했다. 수고비로 크리스마스에 호텔 뷔페권을 선물로 주었더니 직원이 오히려 고맙다며 눈물을 글썽인다. 그녀에게도 거래처에서 선물로 들어온 것이긴 한데 어차피 아이와 둘이 갈 일도 없다. 그렇다고 전남편을 데리고 세 가족이 만나기엔 그게 더 싫었다. 선심 겸 구하기 힘든 선물을 구했다는 '아이에 최선인 부모'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한 비용이면 그리 비싸지도 않은 듯싶다. 쇼핑은 좋아하지만 역시 내 것을 사야 할 때가 좋지, 목적이 있는 쇼핑을 미션 같다. 특히나 지금처럼 비교하는 것도 아니라 정해진 품목을 얻어 내야만 하는 경우라면, 1루에서 오래 머무를 필요도 없다. 공이 떨어졌다는 것만 확인하면 바로 2루로 달린다. 홈까지 도착하기 전에 구해야 한다. 맘이 급해진다. 퀄리티 좋은 캐시미어 코트를 한 팔에 걸고, 호기 있는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교양 없이 뛰어갈 수는 없다. 잠시 벤치에 앉아 쉬어야겠다.
오랜만에 움직였더니 몸이 예전 같지 않다. 안 그래도 무릎 관절이 아파 좋아하던 골프도 못 나가고 있는데 괜히 움직였나 보다.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다. 마지막으로 골프를 나간 게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친구들과의 환갑 기념으로 라운딩 한 게 마지막이다. 더 늦으면 골프도 못한다며 우격다짐으로 모임을 만들어 나간 라운딩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그래도 동창끼리 골프 라운딩을 나가니 그렇게 좋은 줄 몰랐다. 소녀처럼 까르르 웃고 떠들면서 초록초록한 필드를 걸으니 다시 소녀가 된 듯했다. 고년의 정숙이가 이번에 박사학위 따고 스탠퍼드에서 교수 제의가 들어왔다는 아들 자랑만 안 했어도 분위기는 더 좋았을 텐데. 정숙이의 아들 자랑에 저마다 한 마디씩 자식 자랑 하느라 금세 소녀에서 다시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큰아들이 이번에 회사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다며 울상이다. 이놈의 자식은 내가 어찌 키웠는데 대학 때부터 그렇게 놀더니 그 흔한 어학연수도 안 가고, 차라리 보내준다 했을 때 유학이라도 갈 것이지. 이제 와서 고생을 좀 해봐야 한다. 그래도 맘 아픈 건 어쩔 수 없다. 어린 시절 회사일이 바빠 직접 챙겨주지 못한 게 미안하다. 그때는 회사가 막 성장하는 시기라 회사일을 놓을 수가 없었다. 대부분 온라인으로 주문하거나 직원을 대신 보내 사 오게 시키기도 했다. 유치원 시절 딱 한 번 스노우 볼을 직접 사러 나선 적이 있다. 드라마 PPL로 엄청 인기 있었던 장난감을 며칠에 걸려 마트며 백화점을 직접 돌아 직접 사다 준 적이 있다. 엄청 좋아했던 기억에 며칠의 고생이 싸악 씻기는 기분은 아직도 기억난다. 아들은 그걸 다음날 유치원에 가서 자랑한다고 가지고 나갔다 홀라당 깨트리고는 엉엉 울면서 집에 왔었다. 그때 며칠을 고생해서 사 온걸 하루도 안되어서 깨버리니 화가 나 아이 등을 철썩 때렸었다. 나도 때리고는 내가 놀라서 아이를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이 나이가 되면 이런 기억으로 사는가 보다.
어서 일어나 다시 스노우 볼을 사러 가야겠다. 아.. 여기가 어디였더라?
"저기 계시네요"
"어머니 또 여기 오시면 어떡해요. 아이고 경찰관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찾았습니다."
"어머니께서 기억이... 조금 불편하신가 봅니다. "
"예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으셨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자꾸 스노우 볼을 사야 한다 하시며 나가세요"
"스노우 볼이요? 왜? 무슨 추억이라도 있나요?"
"뭐.. 저는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데 유치원 때 한 번 사주신걸 제가 다음 날 가지고 나가서 깨트리고 왔다고 매번 말씀하시네요. 전 솔직히 기억도 나질 않는데 말이죠. 하하 오늘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어머님 찾았습니다."
"예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아가야 우리 스노우 볼 사러 갈까? 이번엔 깨트려도 괜찮아.. 엄마가 꼭 안아줄게"
"예 어머니 어서 집에 들어가요 날이 추워요 네. 저도 이번엔 안 깨트리고 잘 가지고 있을게요"
늙은 여인과 다 큰 아들은 나란히 손을 꼭 잡고 캐럴이 흐르는 쇼핑몰을 천천히 빠져나온다. 어두워진 거리에는 하얀 눈송이가 그들의 어깨에 사뿐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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