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는 4형제의 막내였다. 제일 큰형과는 스무 살 남짓 차이가 날 정도의 막둥이였다. 위로 형뿐만 아니라 누나들도 있었는데 어린 시절을 넘기지 못했다고했다. 집은 시골에 있었다. 낮은 산들 사이로 작은 마을이 있고, 밭농사와 논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사랑방 옆에는 농사에 필요한 소 두 마리가 살고 있는 외양간이 붙어 있었다. 형들과 몸을 끼여 잠을 자다 보면 철퍼덕 소똥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얼마 되지 않는 논밭은 형제끼리 나눌 것도 없었다. 제일 큰형이 부모님을 모시고 농사를 지었다. 사내보다 세 살 어린 조카가 태어났다. 사내는 조카와 함께 자랐다. 둘째 큰형은 공무원이 되어 시내로 나갔고, 셋째 형은 서울로 일하러 떠났다. 몇 해가 지나도 다시 집으로 내려오지 않는 걸 보면 잘 자리 잡은 듯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서둘러 군대를 다녀오고선 공무원이 되었다. 말단 9급 공무원이었다.
여인은 4남매의 둘째였다. 위로는 언니가 있고, 아래 남동생 여동생이 한 명씩 있었다. 여인의 엄마는 둘째에게 유독 모질었다. 첫째를 첫째라서, 셋째는 집안의 대를 이을 남자라서, 막내는 막내라 귀여움만 받으며 컸지만 유독 둘째에게는 살갑지 않았다. 집 안의 모든 살림은 둘째가 담당했고, 집안 가세가 기울었을 때는 다른 집으로 일을 보내기도 했다. 중학교를 마치고는 고등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가 없었다. 둘째는 심성이 모질지 못해 반항하거나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버티고 묵묵히 일만 했다. 멋 내고 싶은 젊은 시절도 있었지만 낼 줄 아는 방법도, 돈도, 시간도 없었다. 그녀는 해가 뜨면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잠들었다. 24살이 되었을 때 아랫마을에서 중신이 들어왔다. 아랫마을 사는 공무원 양반의 막냇동생이 아직 혼자라고 한다. 여인보다 두 살이 많고, 직업은 공무원이란다. 여인은 집에서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어디서 일을 해도 이곳 만큼은 해야 할 것 같았고 내 가정을 꾸린다면 적어도 내가 일한 것을 내가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가진 것도 없었지만 일단 가정을 이루기로 했다.
사내와 여인은 부부가 되었다. 두 집안 모두 결혼을 한다고 무엇하나 보태줄 형편이 아니었다. 부부는 큰 형님 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시골 큰집은 할머니도 계시고 친정어머니만큼이나 나이 드신 큰 형님도 계신다. 쉽지 않은 시집살이다. 80년대가 머지않았는데 아직도 아궁이에 불을 피워 난방을 하고, 소죽을 쑨다. 물은 마당의 펌프를 쓴다. 물을 한 바가지 넣고 위아래로 올렸다 내리길 반복하면 물이 나온다. 이것도 처음엔 요령이 없어 쉽지 않았다. 친청보다 더 오래되고 낡은 집에서 시작한 신혼은 다행히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남편의 직장에 가까운 동네로 작은 방을 하나 얻었다. 말 그대로 작은 방하나와 딸린 부엌이 전부다. 그 작은 방에서도 새 생명은 잉태된다. 아이가 생겼다. 아이가 생겼으니 이제 정말 내 것을 만들어야 한다. 여인의 손은 바빠졌고, 임신을 했으면서도 몸을 쉬지 못했다. 어느 날 아랫배가 당기는 통증이 낯설다 느낄 때, 그녀는 하혈을 하고 첫 아이를 잃었다. 여인은 애써 덤덤한 척했다. 생애 처음으로 정말 아무한테도 빼앗길 수 없는 자신을 것이라 생각했던 첫 아이를 그렇게 보냈지만 그녀는 많이 울지 않았다. 금방 툭툭 털고 일어나 아무 일 없었던 사람처럼 밝게 웃고, 열심히 움직였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가슴에는 작은 구멍이 생겼다. 다행히 착한 부부에게 곧 예쁜 아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열심히 이사를 다녔다. 어떻게 하면 돈을 아낄 수 있을까 둘이 열심히도 고민을 했다. 조금 더 월세를 아낄 수 있으면 몇 달이 되지 않아도 집을 이사했다. 이삿짐도 손수 싸고 지인의 트럭을 빌러 옮기고, 도배나 장판도 새로 하지 않은 방에 세를 들었다. 새로 태어난 아기는 아무것도 모른 채 방긋방긋 잘도 웃었고, 무럭무럭 자랐다. 가진 거라고는 열심히 몸을 움직이는 것 밖에 모르던 부부는 조금씩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조금 더 넓은 방의 월세, 혹은 부엌에 찬바람이 덜 드는 곳의 월세 정도였지만 점점 자신의 것이 생긴다는 재미에 여인은 행복했다. 그리고 둘째가 생겼다. 봄에 꽃이 예쁘게 피는 5월 여인은 뽀얀 피부의 웃음이 예쁜 아들을 낳았다.
사내아이 둘은 언제나 손이 많이도 간다. 세상 무서운 것 몰라 아무것이나 만져보고 입에 넣고,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마당에서 뛰어다니지 못하게, 소리 지르지 못하게 슬며시 소매를 당겨 끌어당겼다. 며칠 전에는 큰 아이가 동네 친구와 집에서 씨름을 하다 바둑밭에 눈두덩이가 찢어졌다. 아이 아빠는 오늘도 늦는다. 어디에 있는지 연락할 방법도 없고, 급한 마음에 수건으로 아이 얼굴을 누르고 아기는 업고 안고 응급실로 뛰었다. 여인은 놀라 눈이 똥그래지는데 큰아이는 울지도 않는다.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응급의 앞에 앉아 치료를 받는다.
- 요놈 제법 잘 참네? 장하다 장해 -
눈썹 끝 눈에 가까운 부분이라 별도 마취 없이 7 바늘을 꿰매었다. 두꺼운 돌로 된 바둑판이었기에 걱정도 했는데 다행히 머리에나 다른 곳의 이상은 없다고 한다. 늦은 밤 응급실을 나왔다. 다행히 큰아이는 걸을 수 있어 함께 손을 잡고 등에는 작은 아이가 새근 잠들어 있다.
- 앞으론 바둑판 옆에서 씨름하지 말어~-
- 응... 미안해요 엄마.. 안 그럴게요.-
- 아니야 괜찮아. 다칠까 봐 그러지 엄마 걱정하잖아 -
-... 네 -
이럴 때 남편은 어디 갔는지 어디 가면 간다고 소식이라도 남겨주지 야속하기만 하다. 회사일로 고생한다고 그러려니 했는데 앞으로는 좀 일찍 다녀라 말 좀 해야겠다고 여인은 생각했다. 그동안 아무런 불평 없이 살았는데 사내아이 둘은 혼자 버거울 때도 있다. 급한 마음에도 전등 끄는 것을 잊지 않고 나왔는데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니 남편이 돌아온 모양이다. 괜히 발걸음에 쿵쿵 힘이 실린다.
- 여봇!! -
- 여보~~ 우리 집 샀어! 이제 우리 이사 안 가도 된다~ 어. 얘는 왜 그래? 다쳤어? -
- 집을 샀다구요?? 어디에?? -
- 어딜 다친 거야?? 눈을 다친 거야?? 피가 났어?? 많이 아파?? -
- 어디에? 얼마에? 몇 평인데? 동네가 어디냐니까요? -
- 7 바늘을 꼬매? 아이고 아빠가 일찍 올걸 그랬네 괜찮아? 안 울었어? -
- 언제 계약했는데요? 언제 이사 가요? 아 글쎄?? -
- 어이구 장하네 장해 울지도 않고 -
- 아이고 잘했어요 나한테 귀띔도 해주지 이양반이 진짜 -
남편은 아내의 의견도 묻지 않고 집을 계약했다. 옥상이 있는 일층 단독 주택이었다. 방 세 개 화장실 하나 그리고 마당도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앞에 더 크고 도로에 접한 집도 같이 매물로 나왔지만, 대출을 받는 게 겁이 나 그 옆에 집을 대출없이 계약하셨다고 했다. 우리는 그 집에서 더 이상 이사 하지 않아도 되었다. 큰 아이 유치원 졸업을 한 달 남기고 이사를 갔다. 병설 유치원이라 유치원 버스가 없어 시내버스에 태워 보냈다. 아침에 버스에 태우며,
- 아저씨 이 아 동명 초등학교 앞 정류장에 좀 내려 주세요 -
- 네 알겠습니다. 얘 여기 잡고 있어라 -
지금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겠지? 7살 아이를 혼자 시내버스에 태워 보낸다는 게. 하지만 80년대여서 그럴까 아니면 소도시여서 그랬을까 아이는 그렇게 한 달을 시내버스를 타고 유치원을 다녔다. 어쩔 때는 기사 아저씨 바로 뒤에 바짝 붙어 서서 가거나, 친절한 아주머니 무릎에 앉아 가고 했다. 다들 아이가 내려야 하는 정류장에 잘 내려 주셨고, 아이는 별로 고생 없이 시내버스로 유치원을 등교했다. 근 30여 년 가까이 지난 기억 때문일까? 아침에 버스를 타고 유치원을 간 기억은 나는데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는 가물가물하다. 아이가 혼자 버스를 타고 돌아왔던가? 어머니가 데리러 오셨던가? 아니면 아버지가 퇴근하시면서?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사 온 동네는 예전 살던 동네보다 막 개발이 되던 동네라 좀 어수선했다. 저기 언덕 위에는 우리 시에서 가장 높은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었고 매일 공사 트럭에 먼지가 자욱했다. 비가 내리면 산 위에서 흐르는 흙탕물을 똥물이라 부르며 땅을 갉아먹는 물길을 보곤 했다. 공사는 생각보다 일찍 끝이 났고, 동생은 통학버스가 다니는 유치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큰아이때는 원복도 없어 노란색 강시모자 같은 동그란 모자 하나만 있었는데 동생은 하얀색 카라 있는 티셔츠와 남색 반바지를 원복으로 입는 유치원엘 다녔다. 솔직히 조금 부러웠다.
여인은 집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여기에 오기까지 8년의 세월 동안 열두 번도 더 이사를 다녔고 악착같이 아끼고 모았다. 이제는 더 이상 이사를 다니지 않아도 되고 제대로 된 살림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도 학교에 들어가니 이제는 시간도 좀 생기고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큰 애는 1학년때부터 반장을 내리하고 있다. 7살에 시내버스를 타고 다닐 정도로 똘똘한 아이니 큰 걱정이 없다. 요즘 들어 작은애가 좀 기운이 없어 보인다. 수업 시간에도 자꾸 존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그런데 졸 때 보면 그냥 낮잠 정도가 아니라 정신없이 잠드는 게 쫌 걱정된다고 하신다. 몸이 허한가 보다. 보약이라도 한 접 지어야 할까?? 애기 아빠도 애들도 건강하게만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빌었다
하지만 신은 그녀에게 그렇게 일찍 행복을 선물하고 싶지 않으셨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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